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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 知와 사랑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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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 知와 사랑

momoDam 2017. 12. 28. 11:21

  상당히 두꺼워서 도서관에서 빌린 기한 내에 다 읽지를 못했다. 끝내지 못했더라도 돌려 주어야 하나 싶었지만, 골드문트의 생애를 읽어서 완결짓고 싶어 3일을 연체했다. 그리고 나는 매우 만족스럽다. 골드문트와 나르치스가 긴 방황 끝에 다시 만나 나누는 인식과 정신과 예술에 대한 대화를 읽지 않았다면 이 책은 나에게 그저 그런 책이 되었을 것이다. 헤세가 '영혼의 자서전'이라고 부르는 이 책은 데미안과 함께 대표적 성장소설의 구조를 갖고 있다고 한다. 30대의 초입, 지금 나도 성장하는 단계라고 스스로 느낀다. 성장의 단계에서 이 책을 만나게 된 것이 무척이나 반갑다. 


p. 60

내가 말하려는 것은 네가 더 현명하다거나 어리석다는 것도 아니고 더 잘났다거나 못났다는 것도 아니야. 내가 말하려는 것은 다만 네가 나와는 다른 종류의 사람이라는 것뿐이야.”_나르치스의 말

그냥 우리는 서로 다른 종류의 사람. 그러므로 서로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다만 친구라는 입장과 배우자라는 입장은 어떻게 다를까? 서로의 세계에 넘어가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는 것이 친구로는 가능할지 몰라도, 배우자도 그것이 가능한가?

 

p. 155

, 사람들은 어째서 그토록 아무것도 몰랐던 것일까? 어째서 이 꽃과는 이야기를 나누지 모했던 것일까? 하지만 사람끼리도 둘이서 진정으로 이야기를 나누긴 힘들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미 행운과 특별한 우정과 마음의 준비가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진정 그렇다. 우리가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이렇게 만나는 것도 행운이요, 서로 알게 된 것은 인연이자 특별한 우정이고, 진정한 대화를 위해 서로의 마음이 열리는 것은 마음의 준비인 것이다. 3박자가 모두 맞아떨어져야 흡족한, 진정한 대화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누군가 말했듯, ‘두 독백이 대화는 아니게 되며, 우리는 서로 자신의 말만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p. 380-381

그렇다! 모든 사람의 삶은 그 두 가지가 서로 뒤섞일 때에만, 이 무미건조한 양자택일로 인해 삶이 분열되지 않을 때에만 의미가 있을 것이다! 예술을 창작하면서도 인생을 그 대가로 지불하지 않아야 한다! 인생을 즐기면서도 숭고한 창조 정신을 단념하지 않아야 한다! 그게 대체 불가능한 것일까?

어쩌면 그런 삶을 살았던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혹시 정조를 지키면서도 관능의 쾌락 또한 놓치지 않은 그런 남편이나 가장도 있지 않았을까? 가정을 지키고 사느라 자유와 아슬아슬한 모험은 경험하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가슴이 메마르지도 않았던 그런 사람은 없는 것일까? 어쩌면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런 사람을 직접 본 적은 없었다.

현실에 발을 디디고 머리로는 구름 너머 이상을 바라보는. 나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p. 411

골드문트가 다시 만난 나르치스에게 자신이 방랑을 하면서 보고 느꼈던 온갖 참혹한 현실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차라리 우리가 태어나지도 말고, 하느님께서 이 끔찍한 세상을 창조하지도 마셨으면 한단 말일세.’

자네는 한 가지 크게 착각하고 있어. 자네는 지금 하고 있는 말에 어떤 사상이 담겨 있는 줄 알고 있단 말이야. 하지만 그건 느낌일 뿐일세. 인생의 두려움을 맛본 한 인간의 느낌일 뿐이지. 그렇지만 이 슬프고 절망적인 감정의 반대편에는 또 다른 감정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게. 자네가 이렇게 말을 타고 기분 좋아 하거나 아름다운 경치를 구경할 때, 혹은 경솔하게도 밤중에 궁성이 잠입해서 백작의 애인을 넘보거나 할 때에는 세상이 전혀 다르게 보일 테지. 어디, 그렇지 않은가?”

...

사람들은 대개 그렇게 살아가지. 그렇지만 이렇게 쾌락과 공포 사이를 절망적으로 방황하거나 생의 쾌락과 죽고 싶은 심정 사이에서 동요하는 것 말고 또 다른 길을 모색해 본 적은 없나?”

...

예술이 자네에게 뭘 가져다주고 무슨 의미가 있었는가?”

무상감을 극복하게 해주었네...”

나도 종종 골드문트가 느낀 것과 비슷한 것을 느낀다. 내가 한 생명을 탄생시킬 수 있는 여자의 몸이라면, 내가 왜 그 아이를 이 세상에 오게 해야 하는 것인가? 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나르치스는 그것에 대해 어떤 사상이 아닌, 단지 느낌일 뿐이라고 정리해준다.

 

p.416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골드문트는 인생의 의미가 새로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인생을 저 높은 곳에서 굽어보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지나온 인생이 커다란 세 단계로 분명히 보이는 것 같았다. 나르치스에 의존하고 또 그에게서 벗어났던 시절, 자유를 누리고 방황하던 시절, 그리고 다시 자신의 내면으로 돌아와 성숙과 수확이 시작되는 시절.

아름다운 환상은 사라졌다. 그렇지만 이제 나르치스와 적절한 관계를 회복했다. 더 이상 의존적인 관계가 아니라 서로 자유롭고 대등한 관계가 성립된 것이다. 이제는 모욕감을 느끼지 않고도 나르치스의 우월한 지성에 어울리는 짝이 될 수 있게 되었다. 나르치스가 그의 내면에 깃들인 대등한 가치를, 창조성을 인정한 것이다.

나의 인생의 단계를 골드문트와 같이 정리한다면, 2018년이 그 한 단계의 시작이 되길 바라다.

 

p. 423

이처럼 조용한 가운데 강력한 통일성을 이루고 있는 이 세계의 한복판에서 골드문트는 자신이너무나 왜소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요한 수도원장, 즉 친구인 나르치스가 이토록 압도적이면서도 조용하고 다정한 질서 속에서 전체를 꾸려가고 다스리고 있는 것을 볼 때만큼 자신이 왜소하다고 느낀 적은 없었다.

조용하고 다정한 질서. 불안하고 정처 없고 떠돌이 같은 나는 그것이 부럽다.

 

p. 428

나르치스의 말_ “신은 여러 가지가 섞여 있는 게 아니라 단일한 존재이고, 가능성이 아니라 순전한 현실성 그 자체지. 하지만 우리 인간은 사라질 존재이고, 변화하는 존재이고, 가능성의 존재지. 우리 인간에게는 완전함도 완벽한 존재도 있을 수 없어. 그렇지만 잠재적인 것이 실현되고 가능성이 현실성으로 바뀔 때 우리 인간은 참된 존재에 참여하게 된다네. 완전한 것, 신적인 것에 한 단계 더 가까워지는 셈이지. 그것이 곧 자아 실현이라 할 수 있겠지.”

인간은 완전함, 참됨에 가깝게 변화하고 성장할 수 있다.

 

p. 437

나르치스의 말_ (골드문트의 고해성사를 들은 후 보속을 주며) “이 속죄의 벌을 가볍게 받아들이지 말 것을 엄중히 당부하네. 자네가 미사 때의 기도문을 제대로 기억이나 하는지도 모르겠어. 미사 기도문을 한 글자도 빠뜨리지 말고 짚어가면서 그 뜻을 깊이 새겨두게. 주기도문과 성모 찬송은 오늘 당장 내가 함께 읽어가면서 어떤 말과 어떤 뜻에 특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가를 일러주겠네. 성스러운 말씀을 사람의 말처럼 말하고 들어선 안 되네. 자네는 하느님 말씀을 건성으로 흘려듣기 십상일걸세. 아마 그런 경우가 자네 생각보다는 훨씬 잦을 거야. 그럴 때마다 오늘 이 시간과 나의 충고를 떠올리게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심정으로 말씀을 따라하고 가슴에 새겨두어야 하네. 오늘 내가 자네한테 보여주는 그대로 말일세.”

마치 나르치스가 나에게 하는 말인 것 같다. 골드문트가 수도원을 떠났듯, 나도 15년 넘게 다니던 성당을 떠났다. 성당을 다니는 동안, 나는 사람의 말처럼 기도문을 외지는 않았던가. 나르치스와 같은 인도자가 내게도 있을까.

 

p. 444

나르치스의 말_“골드문트, 나는 자네에게 많은 것을 배우고 있네. 예전에는 예술이 사상이나 학문에 비해 진지하지 못한 영역이라고 생각했었거든. ...자신의 삶을 숭고하게 하고 의미 있게 만들려면 감각적인 것에서 출발하여 정신적인 것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지. 나는 그저 의례적으로 예술을 높게 평가하긴 했지만 실은 교만하게도 예술을 얕잡아보았었네. 그런데 인식에 도달하는 길이 얼마나 다양한지 이제야 알 것 같네. 또 정신의 길이 유일한 길은 아니며 어쩌면 최상의 길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네. ...우리 같은 사상가들은 하느님의 존재에서 세속적 요소를 제거함으로써 하느님에게 가까이 다가가려고 애쓰지. 그런데 자네는 하느님의 피조물을 사랑하고 재창조함으로써 하느님에게 가까이 다가간다는 말일세.”

나 또한 어쩌면 예술을 그렇게 보고 있었던 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는 예술에서 진정 인식을 본 적이 있었던가? 나의 눈은 그걸 볼 수 있을 정도로 밝아져 있었던가?

 

p. 456

모범적인 삶의 질서와 규율, 세속적 욕망과 감각적 쾌락의 단념, 더러운 일과 피 묻히는 일을 멀리하고 철학과 기도에만 몰입하는 것이 과연 진정으로 골드문트의 삶보다 더 낫다고 할 수 있을까? 인간이란 존재는 정말 정해진 규칙대로 살아가도록 되어 있는 것일까? 인간의 시간과 운명이 예배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처럼 그렇게 정해져 있는 것일까? ... 그래, 어쩌면 골드문트와 같은 인생을 사는 것이 그저 유치하다거나 인간의 한계라고는 할 수 없는지도 몰랐다. ...어쩌면 세상의 끔찍스런 흐름과 혼돈에 자신을 내맡긴 채 그러다가 죄를 짓기도 하고 죄의 쓰라린 결과를 감수하기도 하며 살아가는 것이 결국에는 더 당당하고 위대한 것인지도 모른다. 다 해진 신발을 신고 숲과 시골길을 누비고 다니며 눈비를 맞고 굶주림과 곤핍한 처지를 겪고 감각의 쾌락을 즐기다가 고통의 대가를 치르고 살아가는 편이 어쩌면 더 힘들고 용감하며 고귀한 것인지도 몰랐다. ...골드문트는 그러면서도 왜소하거나 천박하지 않았고, 자기 속에 깃들여 있는 성스러움을 죽이지도 않았다. 어두운 욕망에 깊숙이 말려들어 방황하면서도 그의 영혼의 성스러운 곳에서는 성스러운 빛과 창조력이 결코 소진되지 않았던 것이다.

어떤 삶도 보다 못하거나’ ‘실패하거나’ ‘나쁜삶은 없다.

 

p. 469

골드문트, 진작에 말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네. ... 오늘은 내가 자네를 얼마나 좋아하며, 자네가 늘 나한테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는지, 자네가 내 인생을 얼마나 풍요롭게 했는지 털어놓아야겠네. ...하지만 나는 다르다네. 내가 살아온 인생에는 사랑이 빈곤하고, 나의 인생에서 무엇보다 결여되어 있는 것이 사랑일세. ...그런데도 내가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면 그건 자네 덕분일세. 자네만은 사랑할 수 있었으니까. 사람들 가운데 오직 자네만을 말일세. 이게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자네는 어림도 못할걸세. 그건 사막에서 솟구치는 샘물이요, 황무지에서 꽃을 피우는 나무와 같은 걸세. 나의 마음이 황폐하게 메마르지 않고, 하느님의 은총이 닿을 수 있는 자리 하나가 나에게 남아 있는 것은 오직 자네 덕분일세.”

나도 듣고 싶고 해주고 싶은 우정의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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