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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Book

황천의 개_후지와라 신야

momoDam 2018. 11. 11. 18:42

<황천의 개>_후지와라 신야

 

p18

나는 이듬해에 대학을 중퇴하고 일본을 떠날 작정이었다. 여행을 선택한 이유 같은 것은 없었다. 만약 젊은 날의 충동적인 행위에 스스로 이유를 붙일 수 있거나, 객관화시킬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 청년이란 사리나 이치가 아닌 동물적 감성으로 세계를 헤아리고, 온몸으로 자신의 행동을 설명하려고 한다. 사리나 이치는 육체적 열광이 식어버린 후에 찾아오는 변명에 불과하다.

 

p19

일본을 떠나 인도로 눈을 돌린 이유는 그 가혹한 원시의 자연 속에서 내가 살아 있다는, 지금 이곳에 내가 존재하고 있다는 가장 기본적인 감각을 되찾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나 자신은 의식하지 못했으나 이 여행은 신체와 연관이 깊은 여행이었다.

 

p36-37

기독교뿐 아니라 유대교, 이슬람교 같은 사막에서 발생한 종교들은 대체로 규범을 상실한 자연과 그런 환경 속에서 자연을 대신해 비대해지는 인간의 자아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비대해진 자아는 결과적으로 과대망상이라는 정신병리학적 행태를 나타낸다. 이들 종교는 인간의 자아를 자연과 동화시킴으로써 진아(해탈)’을 희구하는 동양 종교와는 정반대되는 정신의 벡터다. 유럽을 방문하면 이런 차이가 쉽게 눈에 띈다. 유럽인들은 유라시아 대륙이라는 자연을 완벽하게 제압했다. 그리고 인간의 이상이 실현된 도시들을 건설했다. 그렇게 건설된 도시에서 인간이 가축으로 선택한 개나 말은 인간과 함께 거리를 거닐고, 가지를 늘어뜨린 마로니에 가로수들은 마치 그리스 시대의 인류가 이상적인 삶의 명제로 여겼던 것과 똑같은 모습으로 정리되어 있다. 우리는 그런 것들을 서양의 미라 부르며 동경해왔다. 그러나 사물을 관찰하는 방식을 조금만 바꿔본다면 서양인들이 원하는 삶의 명제야말로 끝없이 비대해지고 있는 인간의 자아, 즉 과대망상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p44

규슈의 고향 근처에 있던 대사신앙의 기도사는 계절을 불문하고 아침 해가 뜨기 전에 어두운 바다에서 목욕을 했다. 이로써 신체에 쌓인 독을 정화시키고 자연의 에너지를 흡수했던 것이다. 자연과의 교환 행위인데, 신체에 쌓인 스트레스를 방출하고, 자연이 공급하는 에너지를 흡수한다는 점에서 우리가 일상적으로 무의식중에 행하고 있는 호흡운동과 기본적으로 동일하다. , 자연과의 대사 관계를 올바로 유지함으로써 자신의 정신적 리듬을 지켜내는 것이다.

 

p49

그렇게 중얼거리는 노인의 말이 무슨 뜻인지도 모른 채 노인이 사라진 후에도 가방을 베고 누워 사람들의 그림자를 구경했다. 그러나 저 개펄 속에는 알 수 없는 사고의 씨앗이 남아 있었다. 그 씨앗이 서서히 움트며 가지와 잎을 넓혀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p66

만코의 아들이 미리 예약해두었는지 좌석이 준비되어 있었다. 만코는 식당에서도 계속 술을 마셨다. 그런데 아무리 마셔도 술에 취하는 기색이 없다. 나는 만코가 식사를 제의한 까닭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는 잡담 중에 나의 인간성을 꿰뚫어보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좀 더 진솔한 대화를 위해서다, 하고 생각했다.

 

p88

취직을 하고, 사회인이 되고, 애인도 만나고, 머잖아 결혼을 하고, 집을 사고, 아이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자 어쩐지 두려워지는 겁니다. 저의 내면에는 아버지로서 이겨내야 할 강함이라는 게 없습니다. 무저항으로 수월히 지나가는 인생만 원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제 인생에 아버지가 존재하지 않았기에 그런 가르침을 배우지 못한 탓이라고 생각합니다.

 

p93

폐색 상태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쓰토무 군의 바람은 스스로 자각한 것처럼 옴진리교 신도들과 유사한 면이 있다. 그리고 이 같은 해탈의 욕구가 오늘을 살아가는 청년들 마음속에 공통적으로 잠복해 있는 것이라면, 그 욕구를 자각하고 있는 청년과 대화를 나눠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는 나에게서 뭔가를 얻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나에게 뭔가를 가르쳐 줄 것이다. 나이 차는 꽤 있지만 서로에게 미치는 영향은 엇비슷해야 한다.

 

p97

이것은 물론 개인적인 편견이라고 전제하겠다. 그러나 내 경험상 이공계 인간이 만들어낸 문화에는 미학이라는 것이 없다.

 

p99

그 모습들을 통해 오늘날의 젊은 세대는 우리와 달리 외부라든가 풍경에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창밖이란 외부이며, 타자이며, 풍경이며,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자연이다. 그 시기가 언제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시대의 흐름 속에서 오늘날의 젊은이들이 외부 세계를 단념하기 시작한 변절점이 있었다. 전자 미디어가 새로운 외부 세계로 등장하고, 어둠을 배경으로 하는 형광의 문명이 도래한 시기가 그것이다. 자신과 타자 사이의 거리를 배려로 여기는 이증후군이 세상을 뒤덮기 시작한 때와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다. 정치와 경제에 대해 말한다면 생활의 풍요가 보장된 현실 세계에서 시스템은 무의미한 억압처럼 받아들여지는 것이 보통이다. 이 같은 외부 요인들이 현실이고 자연이라면 미디어를 통해 가상 환경에 생존을 의지해온 오늘날의 젊은 세대들은 그 시작부터 현실과 자연으로부터 단절되었다고 할 수 있다. 외부 세계는 그들에게 돌아갈 고향이 아니다. 물론 젊은 세대들도 외형적으로는 눈에 보이는 바다, 혹은 산을 찾는다. 그들은 이 같은 개념을 아웃도어라고 지칭한다. 말 그대로 자연은 문밖에 존재하는 낯선 환경이다. 삶의 터전이 아닌 일시적인 유희의 대상이다. 목적이 아닌 수단이며, 그렇기에 과거와 달리 생활을 지배하는 절대적 가치가 될 수 없다.

이처럼 외부 세계에 대한 단념이 오늘날의 젊은 세대가 인생을 살아가는 생존 양식이 되었다면 호텔 레스토랑에서 어두컴컴한 테이블을 선택하는 것은 그들이 보여주는 그들만의 생존 형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덧붙여 말하자면 외부에 대한 젊은 세대의 이 같은 단념은 1995년 발생한 옴진리교 사건을 통해 더욱 구체적인 형태로 나타났다고 해야 될 것이다.

 

p104

미국을 보라고. 저렇게 어둡고 쓸쓸한 나라는 없을 거야. 그래서 필요 이상으로 밝은 척하는 거라고. 지금까지 꽤 많은 민족을 관찰해왔는데 이 지구상에서 가장 밝고 쓸쓸한 인류는 캘리포니아의 디즈니랜드 야외무대에서 에어로빅 연기자들을 지도하던 강사였어.”

 

청년은 재미있는 말을 했다. 지나치게 밝은 행동은 우울증의 전구前驅증상 (어떤 질병이 일어나기 직전에 나타나는 증상)이라는 것이다.

 

p108

이세신궁은 특수한 건물이야. 거기에 쓰이는 신구의 종류도 특수해. 그것을 만드는 기술은 세대가 바뀌기 전에 전수되어야 하지. 수 백 년 동안 보존된다면 건물은 멀쩡해도 장인은 사라지게 돼 있으니까. 이건 단순히 기술을 전승한다는 의미가 아냐.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손끝으로 하는 일엔 반드시 마음이라는 게 전해져. 장인의 기술을 계승한다는 것은 마음을 계승하는 것과 마찬가지야.

 

p132

뼈를 태운 냄새가 콧구멍 속으로 밀려드는 거야. 구운 오징어와 비슷한 냄새였어.

처음 그 광경을 봤을 때는 정말 이렇게 해도 상관없단 말인가, 하고 생각했어. 이렇듯 아무렇지 않게 보여줘도 괜찮다는 건가, 하고. 그때까지 내가 자라난 일본에서는 인간이 좀 더 귀한 대접을 받아왔다고. 인간의 목숨은 지구보다도 무겁다는 말을 자네도 알고 있을 거야. (...)

하지만 인간의 목숨이 지구보다 중요할 수는 없어. 목숨을 중히 여기는 것은 당연하지만, 인간의 목숨이 최우선이라는 과대평가 때문에 과보호와 에고이즘이 아이들의 몸과 마음을 얼마나 나약하게 만든 것인지 우리는 잘 알고 있잖아. 그래서 사람들은 죽음과 시체를 금기로 여기고 철저히 은폐해왔지. 어리석은 선택이었어.

우리는 지나치게 목숨을 과대평가했고, 죽음이 우리 곁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믿어왔지. 그 믿음이 살아 있다는 존재감을 희석시킨 주범이었어. 부모의 기대와 과보호에 노출된 아이들이 커갈수록 자신의 소중함을 증명하려고 초조해하듯, 현대인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살아 있다는 진실 앞에서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게 된 거야.

 

p144.

화장터에 처음 갔을 때처럼 정체를 알 수 없는 묘한 기분에 사로 잡혔지. 인간이 짐승의 먹잇감으로 전락해버렸다, 내가 살던 곳에서는 지구보다 무겁다라고 말하던 인간의 목숨이 아귀 같은 들개들에겐 한낱 먹잇감에 지나지 않는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꼴좋군, 하는 생각이 드는 거야. 이유는 잘 모르겠는데 속이 후련해지는 것 같은 기분이었어. 이유는 나도 모르겠어. 뭔가로부터 해방되고 가벼워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 도대체 무엇으로부터의 해방감이었을까. 자아였는지도 몰라. 혹은 사회였는지도 몰라. 서구화를 목표로 우리들을 감시하고 관리했던 근대화였는지도 몰라. 민주주의 사회가 가르친 것처럼 나라는 존재는 그렇게 대수로운 게 아냐. 출산율이 감소되면서 부모와 사회는 하나뿐인 자식을 과잉된 기대와 과보호 속에서 키우고 있는데 인간은 우리가 그토록 많은 기대와 희망을 걸 만큼 대단한 존재가 아냐. 동물이나 곤충과 다를 게 하나도 없는 거야. 그렇게 생각하니 어깨에서 짐을 내려놓기라도 한 것처럼, 혹은 화장터의 불길을 바라보고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기분이 편해졌어. 그리고 눈앞의 광경이 분명하게 보이기 시작했어.

 

p159

...모래는 때와 장소를 정하지 않아. 풍문(風紋)(바람에 의해 모래 위에 생기는 무늬)의 모양을 쌓고는 사라지고, 또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지. 모래는 순간의 환영(마야)처럼 사라지고 나타나기를 반복해. 그것은 물질이면서도 물질이 아니지. 그 마야의 모래로 만다라를 그린다는 것이 만다라가 지니고 있는 진짜 의미야. 극채색의 모래에 의해 모래의 누각이 생성되고, 거기에 생명이, 세계가 나타나는 거지. 하지만 그 세계는 순식간에 사라져버리는 거야.

그 의식은 현실이 마야임을 보여주고 있지. 이 세상이 곧 저승이라는 거야. 한마디로 색즉시공이지.

 

p168

‘...지금 당신이 있는 장소에는 숱한 소리와 목소리들이 웅성거리고 있어. 그 속에서 가장 작은 소리에 귀를 기울여봐. 그러면 당신의 의식은 집중하기 시작할 거야. 그 작은 소리가 확실히 들린다면 이번에는 그보다 더 작은 소리를 찾아내는 거야. 그리고 또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거야. 그 소리가 또 확실하게 들린다면 그보다 더 작은 소리를 찾아내고, 그 소리에 귀를 기울여. 그렇게 천천히 당신 앞으로 침묵을 끌어내봐. 어부가 그물을 당기듯이.’

 

p183

1960년대를 상징하는 것은 학생운동과 히피 무브먼트였다. 이 상징적인 사건들이 전 세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했다. 그것은 체제에 대한 반발이었다. 그 같은 반발 심리의 밑바탕에는 머잖아 도래하게 될 사회에 대한 두려움이 깔려 있었다. 신체와 환경의 폐색이 보편화되는 사회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1960년대의 청년 운동이 다분히 동물적이었던 것은 그 때문이다. 동물적인 본능에 의해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감지했던 것이다. 물론 당시의 시대상을 겪은 후 내 나름대로 회고해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1960년대에 나는 무척이나 초조했다는 점이다. 일본이라는 나라에서 내 본래의 신체가 사라져가는 것을 느꼈다.

내 몸에서 감각이 사라지기 전에 일본을 탈출한 나는 거칠고 사나운 풍경 속에 나의 육신을 드러냈다. 미적지근한 일본에서 20여 년간 성장한 나의 말랑말랑한 살과 뼈들은 그 처참한 환경을 겪으면서 조금씩 골격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그 위에 단단한 살들이 덧입혀지기 시작했다.

 

p225

종교의 존재 이유가 인간의 마음을 평화로운 상태로 이끄는 데 있다면, 그 과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 첫째는 망상과 관념으로 인간의 마음을 이끄는 것이다. 둘째는 존재의리얼리티를 직시하게 함으로써 망상과 관념을 벗어던지게 하는 것이다.

내 경우는 두 번째 과정을 통해 마음의 평정을 얻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봤을 때 종교라는 시스템을 추종한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종교적 체험을 쌓았다고 하겠다. 인도 대륙이 이토록 종교적인 이유는 이 땅의 모든 기후 조건과 생활 조건들이 너무나 리얼하게 현실의 숙명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1960년대 일본에서 리얼리티의 희박(또는 가상의 리얼리티를 추종하는 시대적 동향)에 두려움을 느낀 한 청년이 인도에서 대륙을 방황한 것도 따지고 보면 이 땅의 종교적인 풍토를 체험함으로써 자신의 삶에서 리얼리티를 회복하려고 했던 시도로 여겨진다.

 

p284

길가에서 동물과 마주치면 언제나 그런 식으로 행동했다. 낯선 인간이 눈앞에 나타나면 동물은 겁을 내며 경계한다. 그럴 때는 시선을 낮추거나, 무방비라는 것을 확인시키기 위해 고개를 옆으로 돌리거나, 등 뒤로 돌아서곤 한다. 동물의 경계가 느슨해졌다고 생각되면 마음을 열고 이야기를 건넨다.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상태에서 더는 다가서지 않는다. 상대방이 내게 관심을 보일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 “다음엔 어미 산양의 뿔에 손을 내밀어보십시오.” 이보다 더 어려운 시도가 또 있을까. 나를 죽일 수도 있는 무기를 향해 상냥하게 손을 내밀어보라는 것이다. 평생 동안 그런 시도는 해보지도 못하고, 또 성공하지도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동물의 마음에 다가서는 것보다 같은 인간의 마음, 그것도 미쳐버린 인간의 마음에 다가서는 것이 더 어려운 법이지요.”

 

p309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어. 가슴속이 답답해졌지. 대체 누굴까, 저 사람은. 일본에서 20년 넘게 자라는 동안 한 번도 겪어본 적이 없는 이해되지 않는 만남이었어. 무슨 이유에선지 내 가슴이 뜨거워지기 시작했어. 그가 왜 그랬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어. 그는 단지 나와 함께 이곳에 앉아 있고 싶었던 거야. 그게 전부였어. 아무런 의도도 없는 사람의 마음이 존재할 수 있다는 걸 그때 처음으로 알게 되었어. 나란히 앉아 있으면서 한마디도 주고받지 않는, 단지 그 시간을 함께 공유하고는 떠나버렸어. 그 자리에 사람과 사람이 있고, 두 사람은 무엇인가를 주고받아야 한다는 게 아니라 단지 그곳에 두 사람이 존재했다는 것, 함께 존재했던 그 시간과 기억만을 남긴 채 그는 내 앞에서 사라진 거야.

처음부터 그에겐 아무런 의도도 없었어. 보통의 일상이었을 뿐이야. 그런데 나는 충격을 받았어. 과장되게 말한다면 내가 생각하는 인간의 역사라든가, 문명, 사회 등을 아무렇지 않게 뒤집어버린 셈이었지.

 

p314

티베트는 건조한 광물 사막의 세계다. 그리고 빛의 세계다. 그리고 대지는 4,000미터의 중천에 떠 있다. 이곳은 완전한 추상의 세계다. 그 세계에서 신체의 현실감각을 유지하려면 어둠과 지옥이 필요하다. 땅속 깊은 곳에 측심기의 납으로 만든 추를 떨어뜨려 지옥 기조음을 끌어올리는 것이다. 갈증을 풀기 위해 생명수를 찾아 헤매듯. 그 어둠의 생명수는 햇살에 바싹 마른 세포에 녹아들었고, 추상적 신체에 윤기와 구체성을 전해주었다. 그 생명수는 정신의 균형을 유지해주는 음악이었다. 지옥의 소리가 인간의 신체에서 화학 변화를 일으키고, 마침내 관세음으로 변모하는 것이다. 내가 그 지옥 기조음에 반응한 것은 나 역시 어떤 의미에서는 사막의 주민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도시 생활자라고 불리는 사막의 표류자였다. 내가 살던 도시는 티베트와 마찬가지로 추상적인 광물 세계였고, 사람들의 신체는 바삭바삭하게 건조되어 있었다. 인공의 빛이 가득한 그 세계엔 어둠도, 밤도 없다. 대지는 아스팔트와 콘크리트에 완전히 봉쇄되어 있다. 빌딩이라는 중천에 세상이 있다. 과잉된 정보의 상품화는 현실과 인간의 어두운 부분에 밝은 빛을 내보이고, 백일하게 드러내고, 소비하고, 한순간에 증발시킨다. 이 밝음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불안해진다. 아니, 그것은 밝음이 아닌 표백이었다. 그래서 1995년의 청년들은 도시가 선사한 밝음을, 아니, 강요된 표백을 거부한 것이다. 그리고 어두컴컴한 방 안에서 표백된 자신의 신체에 지옥의 희화(戱畵)를 물들였던 것이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Y와 나는 도시에 의해 강제로 표백된 인간이었다. ‘라는 어둠을 상실한 인간이었다. 그래서 등 뒤로 흘러나오는 장엄한 지옥 기조음에 귀를 기울였던 것이다. 그 소리에 우리의 상처가 치유될 거라고 생각했다.